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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성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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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성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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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회 5권 7. 십팔자 도참설(4)

  • 작성일 2010-12-07 오후 6:37:00 |
  • 조회 1893

1126년 인종 5년 4월이 되었다. 4월은 신록이 불타는 계절이지만 개경은 음산하기 그지없었다. 바로 불타버린 황궁 때문이었다. 황제는 중흥댁에서 연경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연경궁은 불에 타지 않아서 대충 수리만 해서 황제가 기거하도록 조처를 취했다.

불타버린 궁궐을 새로 짓느라고 백성들의 고혈을 짜낼 수밖에 없었다. 황실에 새로운 집을 지을 돈은 어디에도 없었다. 내탕전도 바닥나 버린 지 오래되었다. 천민이든 양민이든 할 것 없이 세금이 매겨졌고 세금을 내지 못한 사람들은 사노비로 전락했다.

문벌귀족들은 이참에 제 뱃속을 채우려고 작정을 했는지 세금 부과에 혈안이 되었다. 천민과 양민들의 고통이 늘어날수록 귀족들의 배는 불러갔다. 정말 몹쓸 놈의 세상이었다.

“아무리 긁어도 나올 것이 없는데. 경상도 밀양 땅에 의적이 나타나서 관공서를 털었다면서…….”

도적들이 횡횡했고 강도들이 때를 지어 몰려다니면서 강간과 약탈을 일삼고 있었지만 관리들은 그저 뒷짐만 지고 있었다. 나서보았자 득 될 것이 없었다.

“자네는 이런 더러운 꼴을 보려고 황제를 도왔는가?”

석명천이 바가지에 가득 담긴 막걸리를 한 입에 털어 넣고는 이령을 비꼬았다. 막상 석명천의 비아냥거림을 들었지만 할 말이 없었다. 세상은 점점 미쳐만 갔다. 이자겸과 척준경의 세는 점점 확대되어 갔고 황제는 전보다 더 두려움에 떨었다.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네. 하지만 이게 어디 황제만의 잘못이겠는가? 세상을 탓해야지.”

“형, 아무리 세상 탓이라고 하지만 황제가 정치를 잘하면 이런 꼴은 없지?”

유방이 석명천의 말에 맞장구를 치면서 거들었다. 둘은 그날 이자겸의 집에 갔다 온 이후 급격하게 친해졌다. 생사를 넘나드는 일을 함께 한지라 믿음이 둘을 친형제처럼 가깝게 만들었다.

“유방아, 황제가 정치를 할 수 있도록 환경이 조성되어야 하는데, 지금은 온통 이자겸의 눈치만 보는 세상이니 어떻게 할 수 있겠어?”

“알아. 하도 답답해서 말한 거야. 그런데 형 요즈음 그림에 전념 하더라. 무슨 그림을 그리는데?”

유방이 답답한지 한숨을 푹 내쉬면서 이령을 보고 말했다.

“아니, 그림이나 그리지 달리 뭐할 게 있어? 그래도 그릴 때가 가장 마음이 편해. 요즈음 주로 송악산 전경을 그리지. 너는 주로 뭘 그리는데?”

“요즈음 난 동물 그림을 그려. 주로 꿩 그림을 많이 그리고 있는데 사실은 호랑이 그림을 그리고 싶어.”

“유방아, 꿩은 보고 그릴 수 있지만 호랑이는 잘 볼 수 없어서 어떡하니. 그렇다고 호랑이를 앞에 놓고 그릴 수도 없고 말이야.”

“호랑이를 볼 수 있으면 좋은데 말이야. 언젠가는 호랑이를 보고 말거야.”

“너 정말 호랑이를 보겠니. 까짓 거 호랑이를 보러 가지 뭐?”

이령의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정말이야. 호랑이는 어디에 있는데?”

“여기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북한산, 도봉산이라는 산이 있어. 산세가 험하고 골이 깊어서 호랑이가 살고 있지. 멸악산과 천마산에도 호랑이는 살고 있지만 북한산 호랑이가 순수 고려산 호랑이라고 알려져 있어.”

“그럼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말한 김에 지금 당장 가자.”

성질 급한 석명천이 유방과 이령을 잡아끌었다.

“바쁜데?”

“바쁘긴 좀 쉬었다가 하라고. 도화원 원주가 그 정도 여유도 없나. 참 동문 근처에 가면 천수사란 절이 있는데 아주 절이 아름답다고 하더라고?”

“얼마나 아름다운데?”

“가보면 알지?”

“알았어. 가자고. 도화원에 가서 화구를 가져와야지. 말도 세필 빌리고 말이야.”

유방은 신났다. 호랑이를 보면 좋겠지만 볼 수 없어도 좋았다. 오랜만에 아름다운 산수를 그릴 수 있다는 게 행복했다.

세 사람은 동문을 지나 천수사(天壽寺) 앞에 와서 말에서 내렸다. 정말 아름다운 절이었다. 사찰 주위로 아름다운 봉우리들이 솟아 있었고 절 앞으로 흐르는 냇가에서 많은 사람들이 맑은 물에 손발을 담구면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대부분 강남과 개경을 오가는 장돌뱅이들이었다.

“와! 앞에는 맑은 강물이 흐르고 뒤에는 수려한 봉우리에 바위산이고 옆은 녹음방초 우거진 숲이라. 정말 환상적이네. 저기 중간에 폭포라도 하나 있으면 선경이 따로 없겠는데. 아깝다 폭포가 없어서 말이야.”

“그렇게 아까우면 폭포를 하나 만들지. 마음속에 폭포를 만들면 완벽한 선경이 되지 않겠어?”

“그러면 완벽하겠네. 저기 저 바위에 올라서 형이 대금 연주라도 하면 안개가 춤추고 물이 하늘로 날아오르고 기러기가 부끄러워 저기 숲속으로 숨겠네. 형, 우리 천수사를 배경으로 그림을 한 번 그려볼까? 나는 저 바위위에 호랑이가 헤죽헤죽 웃으면서 절을 보고 있는 장면을 넣고 형은 무아의 경지에서 대금을 연주하는 자신을 그림에 넣으라고 알았지.”

“없는 것을 만들어서 실경에 넣으라고. 그러면 실경이 조화를 잃지 않을까?”

“아니야. 그림은 어차피 인간의 관념이 화폭에 담겨질 때 아름다운 거야. 형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오늘은 그렇게 생각하자고. 아니지 형은 직접 저 바위에 올라서 대금을 연주하면 관념이 아니지. 실경이라고…….”

유방의 말이 맞았다. 이령 자신은 움직이는 물체이기 때문에 실경이 분명했다. 다만 호랑이를 저 바위위에 놓고 그린다면 실경이지만 생각하고 그린다면 관념인데. 이런 때 관념은 실경과 어떻게 다른지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좋아, 누가 잘 그렸는지 내가 심판을 보지. 이긴 자한데 내가 선물을 할게. 막걸리를 통째로 말이야.”

“그것 좋지. 하하하하.”

오랜만에 이령은 통쾌하게 웃었다. 석명천은 정말 도자기 장인이지만 이령에게 있어서 삶의 귀중한 은인이었다.

이령은 화판을 깔고 오색 먹과 붓을 꺼내었다. 언제부터인지 윤초가 준 영초석연과 낭호필은 사용하지 않았다. 윤초를 향한 그리움이 떠올라 견딜 수 없는 아픔으로 돌아오기 때문이었다. 가늘고 길며 부드러운 주련필과 주련필보다 가늘지만 개털, 말갈기 털, 너구리 털을 섞은 겸모로 만들어 탄력성이 좋은 사군자 필, 말의 알몸 털 너구리 털 돼지털 등을 적당히 섞어 만들어 탄력성이 가장 뛰어난 동양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장유, 길이가 짧고 끝이 통통한 채색필, 황모로 만들어 비싸지만 가는 선과 도안용으로 사용되는 면상필을 꺼내놓았다.

‘면상필과 주련필은 이준이 스승님이 나한데 선물한 것인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스승 이준이의 자상한 모습을 떠올렸다. 웃고 있는 스승의 뒤로 윤초가 아름다운 붓을 들고 화사하게 웃고 있었다. 마치 왜 자신이 준 붓으로 그림을 그리지 않느냐고 원망하면서 따지고 있는 듯 했다.

‘아씨를 향한 소인의 그리움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제 먼 발치에서도 바라볼 수밖에 없는 한을 아시는지요. 아씨가 저한데 준소중한 것들을 추억속으로 넣어야하는 아픔을 아시는지요?’

천수사 앞을 흐르는 내와 천수가 그리고 그 뒤에 있는 커다란 바위, 바위위에 사람이 앉아서 대금을 연주하는 모습을 흑연먹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평원법은 잊었다. 화지를 가로로 사등분 세로로 이등분하고 내와 절 그리고 바위와 하늘을 그렸다. 좌측으로 그림을 넣고 우측은 시를 쓸 수 있게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건 마음으로 정하는 것이지 먹으로 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어떻게 그리겠다는 생각을 하면 곧 그려지게 되었다. 이령은 어느새 마음먹은 대로 구안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붓은 때론 강하게 움직이다 약하게 흐느적거렸다. 이령이 눈을 뜨고 앞을 본다 싶었더니 이내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들었는지 요동도 하지 않았다. 석명천은 그런 이령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이령의 그림 그리는 모습은 내가 아궁이의 불을 보는 것과 같구나. 고요함과 순결함이 절정에 달했을 때 진정한 그림이 나오는 것일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걸음을 고유방이 있는 곳으로 천천히 옮겨 놓았다. 고유방은 쉴 사이 없이 중얼거렸다. 무엇을 말하는지 아무리 들어도 모르겠다. 중얼거리다가 붓을 움직이는데 마치 장난처럼 사물이 형상화되고 있었다. 버드나무 가지가 흐느적거리면 화폭에 형상이 가득 채워졌다.

‘이상하네. 두 사람은 그림 그리는 모습은 판이하지만 근접할 수 없는 무게가 느껴지네. 그림의 기법이 달라서 그런지 그림 자체가 달라. 이령의 그림은 우아하면서 소박하고 유방의 그림은 화려하면서도 강건한 그림이야. 분명 두 사람은 채색하는 법도 달라.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령의 그림은 정말 실경(實景)에 가깝지만 유방의 그림은 뭔가 암시하는 느낌이 들어. 누가 잘 그렸는지 판단할 수가 없는데. 졸리는데 에라, 모르겠다. 낮잠이나 푹 자자. 한숨 자고 나면 자기들끼리 결판을 내겠지.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자. 정 앞에 있는 주막집에서 주모의 야들야들한 엉덩이를 보면서 돼지고기 한 접시 썰어 놓고 마시는 막걸리가 제격이 아니겠어. 히히히.’

이령은 스스로를 형상화하는데 골몰하였다. 대금을 연주하는 이령의 모습이 어떠할까? 모든 것을 달관한 신비한 모습일까? 아니면 세속에 찌던 통속적인 모습일까? 손가락은 어떻게 떨리며 애절한 음향을 낼 때 표정은 어떻게 그려질까 등등을 생각해보았지만 자신을 그려낸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세 사람은 천수사로 들어갔다. 하룻밤을 유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그림을 완성하려면 내일 하루는 더 필요했다. 봄날이라서 그런지 절에 머무는 사람들이 꽤나 많았다.

“불청 주지스님, 청하지 않아도 왔습니다. 그것도 혹을 둘이나 달고 말입니다.”

“하하하. 빈승이 불청이나 당연히 청하지 않는 법이지. 세상에 청해야 오는 사람은 부담이 많아서 싫어?”

이령과 고유방은 쓴 웃음을 지었다. 졸지에 혹이 되고 말다니, 하지만 석명천의 말이 재미있지 않는가? 둘 만이 알고 있는 선문답일까? 불청이라는 법명도 그렇지만 석명천 역시 스님에 대하는 태도가 거리낌이 없었다.

“아이고 빈승이 인사가 늦었네요. 불청이라 합니다.”

“저는 작은 혹 고유방이고 이분은 큰 혹인 이령입니다.”

고유방이 넉살좋게 말을 하자 불청이 다시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그나저나 석도공이 절을 다 찾고 세상 오래 살고 볼일이네. 아미타불.”

석명천은 불청이라는 지주를 종종 방문한 모양인데 근래에 이르러서 찾지 않았든 것이 분명했다.

“석공은 요새 아예 도요지를 폐쇄시켰다고 하는데 정말 만들지 않을 작정인가?”

“만들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만들지 못하지요. 능력이 없어서 쉬고 있다는 것이 맞겠지요.”

전에는 이령 때문에 만들지 못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의욕 상실이었다. 심혈을 쏟았던 불민사마저 불타버린 지금 모든 걸 버리고 자연을 친구 삼아 억지로 버티고 있었다.

“석공, 요즈음 좌망(坐忘)과 심재의 경지에서 세상을 산다고 들었는데 사실인 모양이군요.”

석명천은 주지의 말에 부인을 하지 않았다. 불민사가 불타버린 후 석명천은 신선(仙) 사상에 빠져들었다. 잊으면 편한 것을, 그저 산나물을 무쳐 먹고 계곡물에 입을 대고 마음껏 마시면서 그저 발길 닫는 데로 살고 싶었다.

“그나저나 불청 스님 이번에 심사를 좀 해주셔야겠습니다. 이 두 분들은 화가들인데 누가 잘 그렸는지 봐달라는 것이지요.”

“아이고, 두 분이 바둑 내기는 하는 것을 보았지만 그림 내기는 처음 보네요. 하하하. 빈승 눈에 좋으면 그게 좋은 그림이지 않겠습니까?”

이령의 눈빛이 변했다. 불청 스님이 무심코 던진 한 마디에 강한 충격을 받았음이 틀림없었다.

‘그래 그 거야. 다른 사람의 눈에 아름답게 보이는 그림이야말로 천상의 그림일거야. 의도는 가지고 있되 의도를 잊어야, 제대로 된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거야. 어쩌면 제대로 된 그림을 건질지도 모르겠어.’

다음날 계절의 여왕답게 4월의 날씨는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간간히 높은 구름들만 군데군데 떠 있을 뿐 파란 하늘은 높아만 보였다. 이령은 스스로 바위에 올라서 대금 연주를 하는 모습을 연상하고 있었다.

‘유방이는 호랑이를 보지 않고 어떻게 그릴까?’

그런 생각으로 이령은 유방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유방이 그림을 앞에 놓고 멍한 표정으로 바위를 보면서 희죽 희죽 웃기까지 했다. 그러더니 손으로 바위의 뭔가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불청이 다가왔다. 이령을 얼핏 보더니 스치는 말로 중얼거렸다.

“고유방 시주는 심(心)으로 사물을 보고 있어. 어젯밤에 꾸었던 꿈에 나타난 호랑이를 보고 있어. 그것도 무서운 호랑이가 아니라 익살스럽게 생긴 호랑이의 털을 만지고 있어.”

‘뭐라고 유방이가 심으로 사물을 본다고. 정말 유방이 익살스런 호랑이를 그릴까?’

이령은 불청의 말을 믿지 못하고 유방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방이 웃음을 멈추더니 호랑이를 그리지 않는가?

‘헉, 정말이네. 무섭게 포효하는 호랑이가 아니라 장난을 치는 익살스런 호랑이잖아. 천수사를 내려다보면서 웃고 있는 호랑이야. 정말 심(心)으로 사물을 그린다는 말인데. 보지 않고 호랑이를 그리다니, 유방이야말로 천상의 화가인거야. 나는 그릴 것도 없이 졌어. 유방의 그림이야말로 내가 본 최고의 그림이라고.’

“하하하. 시주 심(心)으로 사물을 본다고 최고는 아니지요. 자신의 연주 모습을 연상하면서 그린다는 것은 사실에 가장 근접할 수 있는데 뭘 망설이시오.”

불청이 다시 호탕하게 웃으면서 말을 하였다.

“스님 말씀이…….”

“대금을 꺼내어 소승한데 잠깐만 보여주세요?”

“대금을 보여 달라고요?”

이령은 불청 스님의 말을 들으면서 대금을 꺼내어 보았다. 그림 그리는데 대금을 보여 달라하니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불청이 대금의 전문가라도 된다는 것인지. 이령은 붓을 일단 먹통에다 놓고는 대금을 들어 불청 스님에게 건넸다.

불청 스님이 대금을 요리조리 대금을 훑었다.

“보통 대금은 골이 양쪽으로 파인 쌍골죽(雙骨竹)을 제일로 치지. 이걸 보니 쌍골죽이니 최고중의 최고일세. 취구(吹口)가 하나요, 청공이 하나요, 지공이 여섯 개인 대금이라. 입김을 넣는 강도에 따라서 부드러운 음이 나는 것이 저취(低吹)요, 청아한 소리가 나는 것이 평취(平吹)요, 얇은 갈대청에 진동을 내어 맑은 소리는 내는 것이 역취(力吹)라. 시주를 보아하니 평취를 하는 도다.”

이령은 놀랐다. 어떻게 평취를 하는 것을 알았을까?

“아니지, 저기 저 바위에 올라 연주를 한다면 평취보다는 역취가 좋은 것을. 보자, 갈대청은 있는가?”

보통 갈대청은 갈대의 줄기 안쪽에 붙어 있는 아주 얇고 흰 막이었다. 손가락 굵기의 크기로 단오 전후에 나는 갈대 줄기에서 채취하는 것을 최고로 쳤다. 스님은 이령의 대금에서 갈대청을 때내어 던져 버렸다.

“갈대청은 무슨 갈대청 그냥 평취로 하라고요?”

이령은 순간 짜증이 났다. 역취로 해라 했다가 갑자기 평취로 하라니, 그냥 놀린다는 생각이 들어서 스님에게 뭐라고 중얼거렸다. 그런데 스님은 없었다. 여태껏 이령에게 말하던 불청 스님은 처음부터 없었다. 이령이 꿈을 꾼 것일까? 허벅지살을 꼬집었다. 무지 아팠다. 분명 꿈은 아니었다.

이령은 다시 유방의 그림을 훔쳐보았다. 분명히 익살스런 호랑이었다. 유방은 정말 호랑이를 상상하면서 그리고 있을까? 그게 가능할까? 더군다나 익살스런 호랑이를 연상시키는 게 쉽지 않다. 심(心)으로 형상을 그릴 수 있을까?

‘대금을 연주하는 내 모습은 정말 어떠할까?’

한 번도 생각하지 않는 것이었다. 단아할까? 다소 우스울까? 슬픈 표정일까? 늘 기쁜 모습일까? 주로 나는 평취를 사용했지. 그래서 맑은 소리를 즐겨내었는데.

“유방아, 익살맞은 호랑이를 어떻게 연상하지?”

이령이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물었다. 유방은 호랑이의 흰 수염을 그리다가 이령의 질문에 돌아보았다.

“형! 뭐해? 자기 자신을 그리는데 왜 그리 고민을 많이 하지. 나는 그냥 내가 생각하는 데로 그려. 사실 지난번에 호랑이를 그려보았어. 물론 모사였지만. 모사면 어때. 어차피 그림은 화가의 뜻에 따라 모양은 바뀌는 것을. 그래서 지난번 그린 무서운 호랑이의 모습에다 입모양과 눈 모양을 조금 바꾸어 보고 있어. 형이 생각해도 호랑이 모습이 익살스럽지. 전문가의 눈에 그렇게 보이면 이건 틀림없는 수작(秀作)이야. 제 아무리 무서운 호랑이라도 이 아름다운 천수사에서는 웃지 않을 수 없지 않겠어?”

‘뭐라고 모사라고. 과거에 그린 그림에다 슬쩍 눈 모양을 바꾼다고. 그건 쉽게 심으로 형상을 본다는 것이잖아. 호랑이도 천수사에서 웃지 않고 못 배긴다고. 그렇다면 나는 나 자신의 모습을 꼭 닮은 모습으로 그리려고 했다는 말인가? 나는 사람일 뿐인데. 사람의 모습은 누구나 비슷한데 유방은 느낌을 살리고 있지만 나는 느낌을 살릴 수 없어…….’

심으로 사물을 보면서 느낌을 얻어 호랑이를 그리는 유방은 결국 과거 호랑이를 그려보았기 때문이었다. 이령은 자신의 대금 연주하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또 그려보지 못했기 때문에 느낌이 없었다.

‘거울을 갖다 놓고 그린다면 똑같이 그릴 수는 있지만 느낌이 없어. 느낌과 실경이 조화를 이루어야 해. 나는 너무 실경에만 치우친 것이 아닐까? 그러다 보니 진정한 실경도 지금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뭔가 떠오를 것 같지만 떠오르지 않아, 감이 잡히는데 막상 붓을 들어 그리려니 감(感)은 사라져 버리는데.’

그때 개봉 봉황루에서 조길 황제와 그림을 겨룰 때 예성강을 보지 않고 느낌으로 그렸지 않는가?

‘그때와 지금은 다르잖아. 그때는 모연과 윤초 아씨와의 추억을 담고 있어서 예성강 정경은 내 마음에 살아 있었고 지금 천수사는 처음 본 곳이라서 느낌이 없어. 느낌을 찾아야 해. 저기 저 바위에 올라 직접 연주해 보자. 어차피 그림은 틀렸으니 대금 연주나 실컷 해보고 가자. 내 자신의 연주하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말이야.’

이령은 화판을 대충 정리하고 대금을 가지고 바위에 올랐다. 고유방이 뭐라고 했지만 못 들은 척 하고 바위 쪽으로 천천히 다가섰다. 바위에서 보는 천수사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앞에서 보는 모습과 다른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보는 각도에 따라서 실경은 달라져. 달라진다는 것이 진짜 모습인가? 마음의 느낌일까? 정말 의문투성이네.”

이령은 눈을 감고 몰아지경에 빠져들었다. 연주를 할 때면 항상 빠져드는 마음이었다. 취구에 입을 대로 일곱 개의 구멍에 손가락을 갖다 대고는 아무렇게나 움직였다.

맑은 소리가 울려 나왔다. 이미 태양은 서산으로 기울고 있었다. 반쯤 걸린 태양이 이령의 대금 소리에 반했는지 오랜 시간 그대로 멈추어 버렸다.

“이봐 이령, 졌으니 근사한 저녁 사야지.”

“형 막걸리 먹으러 가자.”

석명천과 고유방이 이령을 향하여 뭐라고 말을 하고 있었지만 이령은 무아지경에 빠져 대금을 연주하고 있었다. 태양은 이령의 대금 연주에 실체를 그대로 두기가 부끄러운지 보이지 않았다.

댓글 (1)

너은들 2010-12-07 오후 6:37:00 답글
좌망은 조용히 앉아서 잡념을 버리고 무아의 경지에 들어가면 도에 이른다는 말인데. 보통 물아일체의 경지 즉 진인(眞人)을 뜻하고 심재는 마음을 비워서 깨끗이 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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